우리 시대 최고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서거했다. 역사상으로도 그는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 가운데 한명일 것이다. ‘새로운 음역(tonal range)을 개발한 첼리스트’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만큼 그의 첼로는 독특하다. 어떤 곡들은 그의 연주가 아니면 missfit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첼로 소나타 ‘로망스’가 대표적이다. ‘로망스’는 다른 누구의 연주로도 로스트로포비치만큼 맛을 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혁명의 와중에서 스러져간 젊은 혁명가의 삶을 가슴으로부터 이해하는 까닭이 아닌가 싶다. 그 자신도 조국 러시아 인민의 자유를 위해 용감하게 투쟁해 온 일생을 살았다.
1970년 ‘수용소 군도’로 노벨 문학상을 받고 공개비난에 직면해 있던 솔제니친을 위해 그는 8월 31일에 당기관지 프라우다에 편지를 보냈다. 수용소의 인권유린을 고발한 솔제니친에 대한 비난이 부당함을 강변하는 글이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반동분자로 낙인 찍혀 서슬 퍼렇던 소련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 볼쇼이 극장에 설 수 없었으며 해외 공연과 오케스트라 지휘도 금지당했다. 결국 1974년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수십년이 흐른 후 그는 “내가 만든 최고의 작품은 음악이 아니라 그 편지였다”고 자부했다. 솔제니친은 그의 부음을 듣고 “러시아 문화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고 말하며 “Goodbye my beloved friend !"라고 조사를 끝맺었다.
한달 전 크레믈린 궁으로 그를 초치해 훈장수여와 함께 80세 생일잔치를 열어주었던 푸틴 대통령은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병마와 치열하게 싸웠다. 우리는 다정하고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 러시아와 세계는 가장 위대했던 음악가이자 휴머니스트를 잃었다”고 추모했다. 자크 시락 프랑스 대통령은 “그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었으며, 우리 시대와 러시아와 자유를 밝힌 위대한 등불이었다”고 애도했다. 이탈리아 지휘자이자 가장 친한 첼로 친구였던 리카르도 무티는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무티의 이 찬사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1974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도 그는 소련당국에 맞서 다시 투쟁했다. 연금중이던 과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구명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 캠페인 전개로 1978년 그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소련으로부터 시민권을 박탈당한다. 그는 "그들이 나와 아내의 사진과 족보를 잘라내 버렸다"며 쓸쓸히 웃었다. 그의 시민권은 1990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고 나선 고르바초프에 의해 회복된다.
그의 인생에서 용감했던 행동은 1991년에도 있었다. 페레스트로이카 개혁에 반발한 군부 강경노선이 일으킨 쿠데타로 크레믈린궁이 탱크로 포위당한 채 옐친이 고초를 겪고 있을 때 그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옐친을 지지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중심 KGB 본부가 있는 쩨르진스키 광장에서 옐친 지지자들을 위한 야간 즉흥 연주를 갖기도 했다. 그 결과 구 소련은 몇달 후 붕괴된다.
그의 인생중 또 하나의 기념비적 시간은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앞에서 가졌던 즉석 연주였다.
45년간 분단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현장을 찾아 그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는 전세계인들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참으로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했다. 1968년 소련군이 체코를 침공하자 1950년 첫 해외연주를 했던 인연이 깊은 도시였지만 그는 결코 프라하를 방문하지 않았다.
소련 당국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1991년 소련군이 철수하자 비로소 그는 체코를 찾았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러시아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 바쿠의 음악 가정에서 태어났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를 사사했다. 13살 때 첫 연주회를 가졌으며 18살이던 1945년 모스크바 국제콩쿠르에서 황금상을 받았다. 올 2월부터 간종양으로 모스크바 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왔다.
그의 장례식은 the Christ the Saviour cathedral에서 거행된다. 이 성당은 그가 기증한 기금으로 1990년대에 재건축된 곳이다. 그리스 정교 대주교인 알렉시 2세는 미망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지칠줄 모르는 공인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16세기에 지은 노보데비치 수도원(Novodevichy convent)에 안장된다. 그의 스승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와 작곡가 알렉산더 스크리아빈이 묻힌 곳이다. 사흘 전에 이 곳에 묻힌 친구 보리스 옐친의 곁에 눕는다.
그는 참으로 전세계 음악을 이끄는 엔진이요 심장이었다.
러시아 지휘자 유리 배쉬매트의 애도사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대단히 공허할 것이다.(Everything will be very empty for a long time now)
이 '행동하던 양심'의 빈자리를 이제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인생의 깊이가 묻어 나던 그 짙은 첼로 선율을 누가 이어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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