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 카라얀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은 2006년이 ‘모차르트의 해’였다면 2008년은 ‘카라얀의 해(Karajan Year)’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이렇게 즐겨 말한다. “여기는 카라얀이 태어난 곳이다. 그런데 모차르트도 여기서 태어났다.” ‘20세기 음악의 황제’ ‘음악의 테크노크라트’ ‘20세기 최고의 상업주의 예술가’ ‘유럽의 음악 장관’이라는 다양한 칭호로 불리는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89).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 세계 음악계가 기념행사로 분주하다. 그는 지금도 살아있다. 그의 음반을 들으며 클래식 음악에 입문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다. 그가 남긴 음반 900장은 요즘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그는 저승에 가서도 매년 150만 달러가 넘는 로열티를 벌어들인다.
2008년은 카라얀의 해
지난 1월 5일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는 조촐한 음악회가 열렸다. 이보 볼튼이 지휘하는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가 R 슈트라우스의 ‘돈주앙 서곡’,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3번’,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5번’을 연주했다. 1929년 1월 22일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케스트라와 같은 레퍼토리를 들고 무대로 나온 20세 청년 카라얀의 지휘 데뷔 콘서트를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올 한 해 세계 전역에서 벌어지는 카라얀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카라얀이 생전에 무척 아꼈던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는 카라얀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23∼28일 베를린ㆍ파리ㆍ루체른ㆍ빈에서 100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을 연주했다. 모두 카라얀이 무대에서 땀과 정열을 쏟은 곳이다.
카라얀은 1938년 베를린필에 데뷔한 이래 베를린을 제2의 고향처럼 여겼다. 69∼70년 파리 오케스트라 예술고문을 지냈고 세 번째 부인 엘리에트는 프랑스 출신 여배우다. 카라얀은 48∼88년 해마다 8월 31일, 9월 1일엔 어김없이 베를린필을 이끌고 루체른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76년 당시 13세의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를 처음 만난 곳도 루체른이다. 카라얀은 빈 국립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고 57∼64년 빈 슈타츠오퍼의 예술감독을 지냈다. 87년에는 빈필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다.
빈 필하모닉은 2월 29일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 드뷔시의 ‘바다’를 연주한다. 카라얀은 37년 빈 슈타츠오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데뷔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은 1999년 카라얀 서거 10주기 추모음악회 때도 빈필이 연주했다.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하는 뮌헨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은 3월 13일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연주한다. 카라얀이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하듯 말년에 즐겨 연주했던 곡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직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빈필과 오자와 세이지가 연주했던 추모음악 중 하나다. 리카르도 무티가 지휘하는 빈필도 8월 15일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 ‘독일 레퀴엠’을 연주한다.
이 밖에도 오자와 지휘의 베를린필이 3월 16일 카라얀이 생전에 창설한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0번’, 4월 10일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R 슈트라우스의 ‘돈주앙 서곡’ ‘4개의 마지막 노래’,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을 연주해 카라얀의 음악세계를 추모한다.
카라얀은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높다. 일본에서만 도이체 그라모폰(DG) 레이블에서 나온 카라얀 전집이 240장의 CD로 묶여 나온다. 4월 5∼11일 도쿄 산토리 홀에서는 ‘카라얀 영화제’가 열린다. 그의 연주를 영상과 함께 감상하는 행사다. 카라얀은 산토리 홀 건축과정에서 음향 자문을 맡았다. 산토리 홀 앞 광장은 ‘카라얀 광장’으로 명명됐다. 음악의 민주화인가, 상업화인가 카라얀은 생전에 900장에 가까운 음반을 녹음했다. 1939년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녹음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서곡’에서부터 89년 타계 3개월 전에 라이브로 녹음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7번’에 이르기까지 리코딩 경력만 50년이 넘는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가장 반기는 것도 DG, EMI, 데카, 소니 등 음반사들이다. 우선 DG에서는 마스터(10장), 골드(2장), 안네조피 무터와의 협주곡 전집(5장), 교향곡 에디션(35장)이 CD로 나오고 브람스 교향곡 전집(베를린필),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베를린필), 마스카니의 ‘카발렐리아 루스티카나’(라 스칼라 극장),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8번’(빈필),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베를린필) 등이 DVD로 출시된다. ‘라인의 황금’은 카라얀이 직접 연출까지 맡았다. 이 밖에도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196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이 3장의 CD로 처음으로 출시된다. EMI에서는 관현악(88장), 오페라ㆍ성악(71장), 카라얀 특선(8장), 교향곡 전집(5장), 카라얀 레전드(2장) 등을 출시했다. 카라얀은 1980년대 초 CD 붐을 타고 DG의 전체 음반 판매고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그가 타계하기 1년 전인 88년 그의 80회 생일에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카라얀은 SP·LP·CD까지 900장이 넘는 음반을 만들어 1억2000만 장을 팔았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만 600만 장 이상 팔았다. 카라얀은 만년에 “앞으로 15년만 더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레이저 디스크(LD)로 모든 레퍼토리를 다시 녹음하고 싶다”고 되뇌곤 했다. 그가 리코딩에 몰두한 목적은 매스미디어를 통해 일부 계층에 국한된 음악의 향수권을 넓혀 ‘음악의 민주화’를 성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국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카라얀을 가리켜 “지휘자 개런티를 엄청나게 올려놓기 시작한 장본인”이라고 꼬집었다. 카라얀이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만 해도 4종이나 된다. 50년대 초에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완성한 첫 전집에 이어 베를린필과도 62·77·85년에 전집을 냈다. 교향곡 제5·8·9번은 빈필과도 녹음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마치 시시포스 신화의 주인공처럼 현실에서 결코 이룰 수 없는 완벽한 연주를 끊임없이 추구했다. 카라얀은 유난히 녹음 신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리코딩 스튜디오에서 직접 음향조정간을 잡는 등 프로듀서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했다. 1981년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은 카라얀의 초청으로 디스크(CD)의 공개 시연회를 잘츠부르크에서 열었다. 무려 34년간 베를린필의 사령탑으로 있었던 카라얀은 베토벤ㆍ브람스ㆍ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전곡을 CD는 물론 뮤직비디오로 남겼다. 65년 설립한 영화제작사 코스모텔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에도 성공했다. 촬영 각도나 자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과 횟수까지 자신이 미리 결정했다. 이 회사는 각종 음악 다큐멘터리와 영화 제작에 손을 댔다. 오페라 ‘오텔로’ ‘나비부인’ ‘라보엠’ ‘카르멘’ ‘장미의 기사’ 등을 영화화했으나 재정적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 필름은 독일 유니텔 소유로 넘어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텔레몬디알사를 설립, 레이저 디스크에 자신의 음악을 담았다. 영상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멀티미디어 시대가 올 것임을 예감한 것이다. 영상과 이미지에 대한 집착은 그의 음반 커버에서도 나타난다. 자신의 지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커버에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82년 화가로 데뷔한 아내 엘리에트의 그림을 커버로 내기도 했다. 82년 100곡을 50장의 CD에 담은 ‘갤러리아’ 시리즈에 이어 카라얀 80회 생일 기념으로 나온 25장짜리 ‘마스터 피스’ 시리즈에는 엘리에트의 그림이 등장한다. 속도와 명상 즐기는 무대 위의 마술사 한때 유럽에서는 ‘카라얀 열병’이 번졌다. 카라얀은 잘생긴 용모로 특히 여성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카라얀에 중독된 중년 여성들은 카라얀이 연주하는 곳이면 어디든 몰려다녔다. 객석 맨 앞자리에 앉는 것도 모자라 오페라글래스를 꺼내 들었다. 약간의 현기증까지 동반하는 이 열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카라얀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뜨거운 박수갈채에 답례도 하지 않은 채 무대에서 총총히 사라지는 카라얀의 ‘오만함’까지 사랑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은발을 날리며 지휘하는 카라얀의 다소 절제된 몸짓과 표정에 연주자와 청중은 최면에 걸린 듯 옴짝달싹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카라얀과 인터뷰했던 ‘보그’지 기자 메리 로블리는 “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올림포스 산을 내려온 제우스신을 만나는 님프가 된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카라얀의 별명은 ‘독일의 토스카니니’ ‘토스카라얀’. 토스카니니의 정확함과 카리스마, 푸르트벵글러의 판타지를 물려받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지휘자와 연주자의 ‘눈맞춤’은 매우 중요하다. 악기별로 새로 시작하는 부분을 알려주기도 하고 연주자에게 긴장을 풀지 말라는 신호를 주기도 한다. R 슈트라우스는 항상 눈높이에서 지휘봉을 움직였다. 하지만 카라얀은 종종 눈을 감고 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휘 도중 눈을 감으면 “음악의 내면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무기력한 지휘’라며 싫어한 단원들도 있었다. 하지만 합창을 지휘할 때는 눈을 감지 않았다. 지휘봉 대신 맨손으로 지휘했다. 합창단은 악보를 절대 보지 못하게 하고 지휘자와의 ‘눈맞춤’을 매우 중시했다. 카라얀은 지휘할 때도 절대 무릎을 구부리지 않았다. 발을 지휘대 위에 올려놓으면 마치 접착제를 바른 것처럼 음악이 끝날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몸통을 돌리긴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양팔만 사용하고 쓸데없는 동작은 하지 않는다. 지휘봉도 짧은 것을 즐겨 사용했다. 절제된 동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회는 언제나 ‘멀티미디어 이벤트’로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다. 그는 무대에 설 때가 아니면 언제나 청바지에 터틀넥을 즐겨 입었다. 빈의 베스트 드레서로 꼽힐 만큼 의상에 신경을 썼으며 해외 순회공연 때는 이탈리아 출신 단골 이발사를 항상 대동했다. 카라얀의 평생 화두는 ‘속도’였다. 자신은 페라리 스포츠카를 몰고, 비서는 롤스로이스에 태워 뒤따르게 했다. 자가용 제트비행기를 직접 조종하는 스피드광이었다. 스위스 상 모리스 호화산장에서는 스키를 타고, 남프랑스 별장에서는 요트와 수상스키를 즐겼다. 속도만 즐긴 게 아니다. 틈틈이 요가를 하며 정신을 집중시켰다. 그는 자기 이미지 관리에 매우 철저했다. 그래서 정면 사진이 별로 없다. 가능하면 측면 사진만 내보냈다. 60대까지만 해도 그의 사진에는 싱싱한 젊음이 넘쳤다. 정치가들도 존경한 ‘유럽의 음악 총감독’ 카라얀만큼 찬반 양론이 크게 엇갈리는 지휘자도 없다. 어떤 평론가는 그의 지휘가 너무 독선적이고 현학적이라고 했고, 어떤 평론가는 너무 세속적이고 대중적이라고 했다.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에서 최대한 매끈하고 아름다운 기술을 뽑아내는 기술을 지녔다. ‘카라얀 사운드’ ‘카라얀 라인’이라는 트레이드마크까지 얻었다. 너무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소리에 윤기가 난다는 비판도 있었다. 1964년 뉴욕 컬럼비아대 폴 헨리 랑 교수는 ‘뮤지컬 쿼털리’지에서 카라얀과 베를린필이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가령 ‘영웅 교향곡’에서는 스포르찬도를 무시했고 악센트 대신에 부드러운 사운드를 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대음악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점도 그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의 레퍼토리는 R 슈트라우스와 프로코피예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카라얀은 외곬의 독선적 성격을 소유한 ‘독재형 지휘자’였다. 단원 선발은 물론 독주자 선정권까지 장악했다. 현재 베를린필은 단원들의 투표로 신입 단원을 선발한다. 단원들의 불만이 뒤늦게 표출된 것은 카라얀이 그들에게 적어도 많은 돈을 벌어다 주었기 때문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지휘할 때 바그너가 지정해 놓은 악기 배치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단원을 앉힌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성취욕도 대단했다. 31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잘츠부르크에서 바이로이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빈 음악원 학생 시절에는 빈 슈타츠오퍼 극장에 근무하는 친척의 도움으로 매일 밤 공짜로 오페라 공연을 보면서 지휘감각을 익혔다. 54년 푸르트벵글러가 세상을 떠난 후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당시 37세의 카라얀이 베를린필의 사령탑을 맡았다. 중요한 기회가 오면 이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결과다. 그의 출세를 도운 결정적인 계기는 38년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지휘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당시 한 평론가는 ‘카라얀 충격’이라고 썼다. 이날 공연은 베를린필 음악감독 자리를 따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83년 당시 34세의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를 베를린필 최초의 여성 단원으로 입단시키는 과정에서 단원들과 마찰을 빚었다. 마이어는 입단한 지 1년 만에 베를린필을 떠났다. 카라얀은 또 당시 10대 소녀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조피 무터를 베를린필 협연자로 선정해 단원들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64년 잘츠부르크 음악제의 운영위원장을 맡으면서 레퍼토리·지휘자·출연진 선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의 고집은 긍정적인 추진력으로도 작용했다. 베를린 필하모니 홀 신축 과정에서 설계 공모에 당선된 한스 샤룬의 설계안이 너무 아방가르드적이라고 해서 취소될 위기에 놓이자 카라얀은 “샤룬의 설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베를린을 떠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카라얀이 아니었더라면 베를린 필하모니 홀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서 있을지도 모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예술감독 제임스 레바인은 “카라얀은 나의 이상형”이라고 말했다. 카라얀의 열렬한 팬 가운데는 정치지도자도 많다. 공개적으로 카라얀에 대한 존경을 표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헬무트 슈미트 전 서독 총리가 대표적 인물이다. 슈미트 전 총리는 “이 사람(카라얀)은 항상 나를 매료시킨다”고 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 정치를 이용하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나치에 입당한 것도 아헨 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따내기 위해서였다. 38년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했을 때 바이로이트에서 히틀러 앞에서 자작곡 ‘영웅 소나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55년 베를린필을 처음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하지만 공연장 앞에서 시위대를 만나야 했다. 나치 당원으로 가입해 협력했다는 이유다. 당시 미국음악가연맹 소속의 음악인 750명이 카라얀의 워싱턴 공연을 막아달라는 탄원서를 미 국무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카라얀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나는 음악가로서 (미국에) 왔다.” 67년 시카고 심포니가 카라얀을 음악감독으로 선임하려다가 시카고 유대인 사회의 극렬한 반대로 포기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과 이츠하크 펄먼,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등 유대계 음악가들은 나치 전력 때문에 카라얀과 함께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57년 당시 49세의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 종신지휘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예술감독, 런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 빈 슈타츠오퍼 음악감독,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수석 객원지휘자 등 무려 네 개의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런던·베를린·빈·잘츠부르크·밀라노·파리 무대를 석권하면서 ‘유럽의 음악 총감독’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카라얀은 ‘유럽의 음악 장관’이라는 호칭과 어울리게 72년 유럽의회(EC)의 공식 음악에 이어 85년 유럽연합(EU)의 공식 국가로 채택된 ‘환희의 찬가’를 편곡했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피날레 중 일부를 발췌해 편곡한 다음 관현악·관악합주·피아노 독주 버전으로 출판했다. 카라얀이 72년 3월 베를린필 단원과 녹음한 것을 지금도 쓰고 있다. 가사는 따로 없다. 연주할 때는 반드시 유럽 각국의 국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22~23세의 젊은 연주자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다. 이 곡은 78년 1월 31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에서 열린 EU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처음 연주됐다. 유럽 9개국에서 온 135명의 연주자가 연주를 맡았고 에드워드 히스와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차례로 지휘봉을 잡았다. 무엇보다 소프라노 조수미를 발굴해 유럽 음악계에 널리 알린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공로다. 89년 6월 베를린필이 연주하는 바흐 ‘B단조’ 미사의 독창자로 조수미를 초대했고 그해 7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베르디의 ‘가면무도회’에서 오스카 역으로 캐스팅했다.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신이 내린 목소리”라는 극찬과 함께. ‘가면무도회’ 녹음은 도밍고와 함께 무사히 끝냈으나 공연은 카라얀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게오르그 솔티가 대신 지휘봉을 잡았다. 이장직<lully@joongang.co.kr>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 - 1989 ).
Father
Ernst von Karajan
(1868-1951) Mother
Martha von Karajan (née Kosmac)
(1881-1954) Brother
Wolfgang von Karajan
(1906-1987)
카라얀에 관한 글은 아래 사진을 클릭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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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n Dvorak - Symphony No. 9 OP 95
'From the New World' 2nd Movement in E minor Largo
/ Wiener Philharmoniker[Cond. Herbert von Karajan(1908-1989)]
/ Wiener Philharmoniker[Cond. Herbert von Karajan(1908-1989)]
출처 : 음악의 제우스, 카라얀
글쓴이 : 이하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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