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중국의 4대 미녀

freeman1 2008. 4. 24.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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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왕 소 군 | 세 계 역 사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가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에, 먼저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부귀한 집안의 출신이나 경성(京城)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오직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결국 모연수는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기고,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았으나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리하여 왕소군은 입궁한지 5년이 흘러갔지만 여전히 황제의 얼굴도 보지 못한 궁녀 신분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한(漢) 원제(元帝)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자,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원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는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한 번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명령을 내려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지라, 제각기 예쁘게 단장하여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훨씬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에 원제는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으로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급히 후궁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진상이 밝혀지자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그 후 원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은 마음에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는 수 없이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그 3일 동안에 왕소군과 못 이룬 정을 나누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거리를 꽉 메웠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서서히 늙어 가는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갔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 때 지은 글은 다음과 같다.

호지무화초(胡地無花草) :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봄이 와도 봄같지 않구나

왕소군은 흉노에서 어진 마음으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漢)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과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으며, 지금도 그 묘지는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청총(靑 )"이라 하였다고 한다.

< 내용 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

 

이름은 장( ·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 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인물) 양 귀 비 | 세 계 역 사  

아버지의 임지()인 쓰촨성[]에서 태어나,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의 비()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의 무혜비()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에 행행()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이란 이름의 여도사()가 되어 세인()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되었으며,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로 책립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괵국( )·진국부인()에 봉해졌다. 또한, 친척 오빠인 국충()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하였다. 그녀가 남방() 특산의 여지( )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하려는 지방관이 급마()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한 일화는 유명하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祿)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강요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그녀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정사()도 그녀를 "자질풍염( )"이라 적었으며, 절세()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에도 뛰어났고, 군주()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으로 하여 《장한가()》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진홍()의 《장한가전()》과 악사()의 《양태진외전()》 이후 윤색()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인물) 초 선 | 세 계 역 사  

폐월(閉月)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동탁을 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스토리>

황건적(黃巾賊)의 난에 이은 동탁은 어린 황제 하 태후를 죽인 뒤 조정을 장악하여 잔인한 공포 정치를 펴 공공의 적이 되어 원소가 이끄는 동탁토벌군이 조직되자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게 된다. 많은 충신들이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옆에는 삼국 시개 최고의 무장 양아들 여포가 지키고 있었디. 사실상 한(漢)나라는 멸망하고 군웅할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 충신 중 충신인 왕윤은 동한왕조를 찬탈하려는 동탁을 죽일 결심으로 계략을 꾸며 초선을 동탁눈에 뜨이게 하였다. 왕윤은 먼저 여포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바로 동탁에게 초선을 바친다.

여포는 물론 당대의 영웅이었으나 충분히 젊을 뿐이었다. 동탁 또한 노간신이요 교활하기 그지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호색하기로는 둘째가기 서러운 둘은 양부와 양자가 되어 어울렸다. 초선은 바로 이들이 서로 칼을 들이밀 반간계의 비수로 쓰여진 것이다. 먼저 여포가 초선의 추파에 경도되고, 동탁 또한 아름다운 초선의 눈섶에 혼을 빼앗겼다.

여포가 어쩔 수 없이 초선을 동탁에게 빼앗기다시피 바칠수밖에 없게 되자 마음속이 자연 불만으로 가득찼다. 어느날, 여포가 동탁부에 입부할시 초선을 찾았다. 둘은 봉의정(鳳儀亭)에서 서로 만날 수 있었다. 초선은 동탁에게 받은 괴로움을 짐짓 토하였다. 여포는 당연히 분노하였기에 방천화극으로 동탁이 회부하기를 기다려 찔렀다. 여포는 바로 도주하였다. 당연히 두사람은 서로 극히 미워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왕윤은 여포에게 동탁을 제거하기를 역설하고 여포에게 양부를 죽이게 한다.

<그녀의 미모 수준>

초선은 삼국지 시대인 동한 말년 왕윤의 가기(요즘의 가수)였다. 그녀를 가르켜 천향국색(國色天香)이라한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경성지모(傾國傾城之貌),경국지색(傾國之色)은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나온 고사이다.

초선은 삼국지 초반에 나오는 희대의 동한왕조 간신 동탁에게 발견되어 정쟁에 이용되는 운명에 처한다. 이른 바 달밤에 분향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다는 고사에 이용되었다(於月下焚香禱告上天). 그녀는 계략(이른 바 전형적인 미인계요 연환계)이 성공한 연후에 달밤의 후원에서 왕윤의 무사하기를 기원하고 달에게 절했다. 그때 구름이 달을 가렸기에 왕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초선의 미모에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이른 바 폐월수화,閉月羞花)"

원대경극에 봉의정《鳳儀亭》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 고사를 올린 것이다.
초선은 서시, 양귀비, 왕소군 등과 함께 중국고대사대미녀 중의 일인이다.

<초선의 정체는?>

사도 왕윤의 집 가기(歌妓).
절세의 미인으로 아름답고 총명하여 왕윤이 친딸처럼 대하였다. 동탁의 횡포와 나라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다 왕윤의 눈에 띄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동탁과 여포의 틈에서 그들을 농락하여 결국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했다.
여포가 왕윤을 도와 동탁을 죽인뒤에 그녀를 첩으로 삼았는데, 조조는 여포를 사로잡아 죽이고 그녀를 허도로 보냈다.(연의 8회)
참고로 초선이라는 인물은 사서(史書)에는 없는 사람이다. <삼국지연의>가 <삼국지평화>와 원 잡극을 기초로 만들어낸 문학 형상으로 보인다.

1. 왕윤의 가기였다는 설

이 설은 연의의 영향에 의해 가장 널리 전해져 있어 영향력도 크다. 왕윤은 헌제의 사도이다. 동탁이 조정을 독점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제거하리라 마음을 먹었는데, 동탁이 호색가였던 까닭에 그는 간통의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러나 이 계략에 어울리는 상대를 찾지 못해 번민하고 있었다.
초선은 어릴적부터 왕윤의 집안에서 양육되었다.미인인데다 가무에 능해 왕윤에게 친딸처럼 귀여움을 받았는데, 왕윤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도움이 되려 했다. 하여 연환계의 일부인 미인계로써 여포와 동탁을 이간질하였고 결국 서로를 죽이도록 했다. 계략이 성공한 후 초선은 달밤의 화단 앞에서 왕윤의 무사를 기원하고 달에게 절했다. 그때 구름이 달을 가렸기에 왕윤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초선의 미모에 달도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라고 했다. 오늘날 인용되고 있는 '폐월수화(閉月羞化)의 폐월의 전거가 이것이다.

2. 동탁의 시녀였다는 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설을 믿고 있다. 이 설은 후한서 <여포전>과 삼국지 <여포전>에서 근거한 것이다. 전항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여포는 동탁의 시녀와 밀통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사에는 밀통 전후의 사정이 소개되지 않았고, 또 그 시녀의 이름도 확실하지 않다.

3. 여포의 처였다는 설
여포의 처에 대해서는 정사에 기재되어있지 않다. 그러나 배송지의 주에서 인용한 <영웅기>에 유비가 여포의 진영을 방문했을 때 여포는 '유비를 장막안으로 들이고 처의 침대에 앉게 하였다. 처를 불러 인사시키고 술잔을 나누며 요리를 권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여포의 처가 군대속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 처가 초선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송,원대에는 이 처야말로 초선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삼국지평화>도 잡극 <연환계>도 모두 이 설을 취했다. <삼국지평화>에는 여포의 처는 임씨로 자가 초선이었다고 한다. 한편 잡극 <연환계>에서 그녀의 성은 임, 자는 홍창으로 궁중에 들어갔을 때 초선(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 고관의 관을 장식하였다)의 관을 고나리한 것에서 초선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4. 여포의 부하 장수인 주선록의 처였다는 설
정사 <관우전>의 주에는 '촉기'를 인용하여, 여포의 부하 장수인 주선록의 처는 굉장한 미모였으며 관우가 처로 맞이하려고 생각했지만, 조조가 먼저 선수를 쳐 측실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문에 관우는 발끈하였고 이후 초선을 원망하게 되었다 한다. 원의 잡극 <관우, 달빛 아래 초선을 베다>는 '촉기'의 이 기록을 근거로 만들어졌으므로, 주선록의 처가 초선이라고 보는 경향도 있다.

 

 

"초선이 관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두가지 설"에 관해...

 

 

1. 조조는 세 의형제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관우에게 여포의 아내 초선을 주었다. 관우는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밤낮을 보냈다. 유비는 걱정이 되어 “여자에게 정을 주는 것과, 우리 세 사람의 의(義)와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대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달빛 아래서 초선의 목을 베었다.(전설)


2. 여포 처형 후 장비가 초선을 데리고 와서 관우에게 헌상했다. 관우는 초선을 재운 후에 달빛 아래서 「춘추(春秋)」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예로부터 미녀나 요부들이 남자를 그릇된 길로 인도해서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망했던가. 이 여자 또한 동탁과 여포 부자를 파멸로 이끌었다. 절세 미모에 물오른 버드나무 같은 육신을 보면 마음이 끌리지만 역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관우는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명,청대의 연극)


위의 두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는 줄거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우가 “그녀를 갖고 싶다”고 했지만 조조가 차지하는 바람에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 내용 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

 

 

(인물) 서 시 | 세 계 역 사

서시(西施)는 중국 4대미녀중 하나로, 월왕 구천이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대패하자 와신상담하면서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보내 정사를 폐하고 미색에 빠지게 함으로서 오나라를 멸하는데 주요 역할을 한 미인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효빈(效嚬)과 방빈(倣嚬), 서시빈목(西施嚬目)같은 고사를 만든 여인이다.

오나라가 망한 후 월왕이 서시를 강물에 던져 익사케 했다는 설도 있고, 원래 범려의 정부로 오가 망하자 범려가 데리고 은거해버렸다는 설도 있다.
이백이 쓴 「서시」라는 시에「一破夫差國 千秋竟不還 부차의 나라가 망하자 다시는 돌아 오지 않았네.」로 서시가 범려를 따라 은거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서시(西施 / ?~?)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 이름은 이광(夷光)이며, 절강(浙江) 저라산(苧羅山)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방빈(倣빈) 또는 효빈(效빈)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 오(吳)나라에 패망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의 충신 범여(范여)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후에 서시는 범여와 함께 오호(五湖)로 도피했다고도 하고 또는 강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서시는 양귀비((楊貴妃),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과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녀로 꼽히는데, 이들 중 으뜸은 서시이며, 미의 화신(化身)이자 대명사이다.

춘추 말엽,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였지만 크게 패하였으나, 그는 범려를 재상으로 임용하고 이른바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며 복수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어느 날, 범려는 구천에게 한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오나라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일단 금은보화와 미녀로 오나라 왕을 유혹하며, 내부적으로는 정예병을 훈련시키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천은 범려의 의견에 동의하고, 곧 그로 하여금 미인들은 찾아보게 하였다.
범려는 여러 차례 수소문한 끝에 완사계(浣沙溪)라는 곳에 이광(夷光)이라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광의 어머니는 명주(明珠)를 몸에 맞고 임신하였다가 빛이 찬란한 새가 품에 들어오자 그녀를 낳았다고 하였다. 범려는 곧 배를 타고 완사계로 향했다.
완사계에 도착한 범려는, 채 바위에 기대어 앉아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홍안소복(紅顔素服)의 여자를 발견하였다. 옆에는 흰 비단이 담긴이 바구니가 있었다. 범려는 그 여자에게 물었다.
"낭자께서는 무슨 일로 그리 걱정을 하시는거요?"
홍안소복의 여자는 잘 생긴 사나이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곧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읊조렸다.

"사람들은 봄빛 새롭다하지만, 삼년 봄은 보이지 않고,
맑은 물 넘실거리지만, 나라 잃은 한(恨) 씻을 길 없네"

범려는 깜짝 놀라 한참동안 말을 잃었다.
범려는 몇 차례 알아보고, 그 여자가 이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튿날, 범려는 의관을 갖추고 그녀를 찾아갔다. 범려가 마을 앞에 이르렀을 때, 이광은 작은 돌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범려가 가까이 가보니, 이광의 옆에는 연지나 화장분도 향유나 입술 바르는 기름 따위는 없었으며, 푸른 나뭇잎이 떠 있는 맑은 물 한 그릇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범려는 본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인지라, 그 나뭇잎이 어떤 나무의 것인지 곧 알아차렸다. 그는 곧 물었다.
"낭자께서는 아침에는 비단(沙)을 빨고(浣), 저녁에는 비단을 짜면서도, 어찌 나뭇잎 띄운 물만으로 머리를 감는다는 말씀입니까?"
이광은 그가 전날 보았던 그 사나이라는 것을 알고, 가볍게 웃으며 이렇게 읊었다.

"밤마다 금실 꼬아 비단을 짜지만 모두 공물로 받치네.
가련하도다, 완사 사람들, 등불 밝힐 기름 살 돈조차 없으니."

범려는 다시 한번 놀라며 생각하였다.
"이 여인이 나라와 백성들을 이처럼 생각하다니, 우리 월나라의 희망이로다."
범려는 이광에게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고 함께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데 나서자고 설득하기로 결심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범려는 월왕이 하사한 인부(印符)를 차고, 이광을 찾아갔다. 때가 마침 청명절이라, 월나라의 고풍대로 집집마다 규수들이 모두 짝을 지어 놀이를 나왔다. 나라는 비록 존망의 위기에 처하여 있었지만, 완사계 언덕에서 답청(踏靑)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다. 범려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이광을 찾다가, 문득 깨진 바위 아래에 어떤 여자가 있는 것을 멀리서 보게 되었다. 범려는 가까이 가보았다. 범려는, 그 여자가 바로 이광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았다. 이광은 머리에 흰 비단을 두른 채,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범려가 물었다.
"낭자, 청명가절 이 즐거운 날, 이런 차림을 하고 울고 계시다니, 집안에 슬픈 일이라도 있는지요?"
이광은 울먹이며 이런 시를 읊었다.

"남편이 죽은 것도, 부모가 돌아가신 것도 아니오.
다만 나라가 망했던 날을 생각하니, 슬픈 마음 의지할 곳이 없을 뿐이오."

범려는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놀라며, 손을 꼽아 헤아려 보았다. 바로 3년전 월나라가 망했던 날이었다. 범려는, 이광이 나라의 멸망을 슬퍼하는 우국의 정이 조정의 대신들보다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범려는 인부를 내보이며, 자신의 뜻을 박혔다. 이광은 인부를 보더니, 그 사나이가 월나라의 현신(賢臣) 범려라는 것을 알고, 기꺼이 그의 계획에 따르기로 하였다. 이광은 서시(西施)의 어릴 적 이름이었다

< 내용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

 

저라산()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방빈( )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또 오()나라에 패망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 )가 서시를 데려다가,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치고, 서시의 미색에 빠져 정치를 태만하게 한 부차를 마침내 멸망시켰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후에 서시는 범려와 함께 오호()로 도피했다고도 하고 또는 강에 빠져 죽었다고도 한다.

 

< 내용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