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왕 소 군 | 세 계 역 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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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원제기(元帝紀)」와「흉노전(匈奴傳)」, ≪후한서(後漢書)≫「남흉노전(南匈奴傳)」에 보이는데, 그 내용은 600자에 불과할 정도로 지극히 간략하다. 그 후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민간전설 등의 각종 문학양식을 통해서 그녀의 형상도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 내용 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
이름은 장( ·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로 인정할 수 없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 漢宮秋雜劇:漢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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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양 귀 비 | 세 계 역 사 | |
아버지의 임지(任地)인 쓰촨성[四川省]에서 태어나, 17세 때 현종의 제18왕자 수왕(壽王)의 비(妃)가 되었다. 그러나 현종의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황제의 뜻에 맞는 여인이 없어 물색하던 중 수왕비의 아름다움을 진언하는 자가 있어, 황제가 온천궁(溫泉宮)에 행행(行幸)한 기회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수왕의 저택을 나와 태진(太眞)이란 이름의 여도사(女道士)가 되어 세인(世人)의 눈을 피하면서 차차 황제와 결합되었으며, 27세 때 정식으로 귀비(貴妃)로 책립되었다. 다년간의 치세로 정치에 싫증이 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궁중에서는 황후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고,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 國)·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또한, 친척 오빠인 국충(國忠) 이하 많은 친척이 고관으로 발탁되었고, 여러 친척이 황족과 통혼(通婚)하였다. 그녀가 남방(南方) 특산의 여지( 枝)라는 과일을 좋아하자, 그 뜻에 영합(迎合)하려는 지방관이 급마(急馬)로 신선한 과일을 진상(進上)한 일화는 유명하다. 755년 양국충과의 반목(反目)이 원인이 되어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안사의 난), 황제·귀비 등과 더불어 쓰촨으로 도주하던 중 장안(長安)의 서쪽 지방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 일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군사가 양국충을 죽이고 그녀에게도 죽음을 강요하였다. 현종도 이를 막을 방법이 없자, 그녀는 길가의 불당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정사(正史)도 그녀를 "자질풍염(資質豊 )"이라 적었으며, 절세(絶世)의 풍만한 미인인데다가 가무(歌舞)에도 뛰어났고, 군주(君主)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총명을 겸비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백(李白)은 그를 활짝 핀 모란에 비유했고, 백거이(白居易)는 귀비와 현종과의 비극을 영원한 애정의 곡(曲)으로 하여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한 바와 같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주인공이 되었다. 진홍(陳鴻)의 《장한가전(長恨歌傳)》과 악사(樂史)의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 이후 윤색(潤色)은 더욱 보태져서, 후세의 희곡에도 좋은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
(인물) 초 선 | 세 계 역 사 | |
폐월(閉月) -초선(貂蟬) <스토리> 황건적(黃巾賊)의 난에 이은 동탁은 어린 황제 하 태후를 죽인 뒤 조정을 장악하여 잔인한 공포 정치를 펴 공공의 적이 되어 원소가 이끄는 동탁토벌군이 조직되자 장안(長安)으로 천도하게 된다. 많은 충신들이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그의 옆에는 삼국 시개 최고의 무장 양아들 여포가 지키고 있었디. 사실상 한(漢)나라는 멸망하고 군웅할거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때 충신 중 충신인 왕윤은 동한왕조를 찬탈하려는 동탁을 죽일 결심으로 계략을 꾸며 초선을 동탁눈에 뜨이게 하였다. 왕윤은 먼저 여포에게 결혼을 약속하고, 바로 동탁에게 초선을 바친다. 초선은 삼국지 시대인 동한 말년 왕윤의 가기(요즘의 가수)였다. 그녀를 가르켜 천향국색(國色天香)이라한다. 나라를 망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미녀라는 경성지모(傾國傾城之貌),경국지색(傾國之色)은 모두 그녀에게서부터 나온 고사이다. <초선의 정체는?>
"초선이 관우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두가지 설"에 관해...
1. 조조는 세 의형제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관우에게 여포의 아내 초선을 주었다. 관우는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 밤낮을 보냈다. 유비는 걱정이 되어 “여자에게 정을 주는 것과, 우리 세 사람의 의(義)와 한 황실의 부흥이라는 대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라고 물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달빛 아래서 초선의 목을 베었다.(전설) 2. 여포 처형 후 장비가 초선을 데리고 와서 관우에게 헌상했다. 관우는 초선을 재운 후에 달빛 아래서 「춘추(春秋)」를 읽다가 문득 깨달았다. ‘예로부터 미녀나 요부들이 남자를 그릇된 길로 인도해서 얼마나 많은 나라들이 망했던가. 이 여자 또한 동탁과 여포 부자를 파멸로 이끌었다. 절세 미모에 물오른 버드나무 같은 육신을 보면 마음이 끌리지만 역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겠다.’ 관우는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명,청대의 연극) 위의 두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는 줄거리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우가 “그녀를 갖고 싶다”고 했지만 조조가 차지하는 바람에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 내용 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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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서 시 | 세 계 역 사 | |
서시(西施)는 중국 4대미녀중 하나로, 월왕 구천이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대패하자 와신상담하면서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보내 정사를 폐하고 미색에 빠지게 함으로서 오나라를 멸하는데 주요 역할을 한 미인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효빈(效嚬)과 방빈(倣嚬), 서시빈목(西施嚬目)같은 고사를 만든 여인이다. < 내용출처 : 네이버 오픈사전 >
저라산(苧羅山) 근처에서 나무장수의 딸로 태어났다. 절세미녀였기 때문에 그 지방의 여자들은 무엇이든 서시의 흉내를 내면 아름답게 보일 것이라 생각하고, 병이 들었을 때의 서시의 찡그리는 얼굴까지 흉내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방빈(倣 )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 내용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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