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야기

[스크랩] 음악속 숨겨진 암호

freeman1 2014. 2. 27. 17:22

 

 

 

 

 

 

 

암호




그들만이 나누었던 은밀한 속삭임

“이 곡에는 수수께끼가 들어 있습니다. 그 뜻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어야만 합니다.”
1899년, 작곡가 엘가는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 작품은 ‘수수께끼 변주곡’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러나 엘가의 뜻과 달리, 수많은 음악학자들은 작품 속 수수께끼를 해독하기 위해 덤벼들었다. 그중 몇몇은 비밀의 진실에 접근한 듯 보였으나 이렇게 찾아낸 해답이 엘가가 의도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사라져버렸다. 작곡가가 입을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과연 음악 속에 수수께끼를 삽입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그렇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음명과 계명의 대응이다. 서양음악의 7음계는 ‘음명’인 a-b-c-d-e-f-g와 ‘계명’인 도-레-미-파-솔-라-시라는 두 개의 문자열에 대응된다. 이 글자들을 조합해 새로운 의미를 빚어낼 수 있다. 15세기 작곡가 조스캥 데 프레는 미사 ‘라솔파레미’를 작곡했다. 제목과 같이 ‘라솔파레미’의 계명으로 된 모티브가 작품의 주요 동기가 된다. 작곡자가 이 동기 속에 담고자 한 메시지는 ‘라솔파레미’과 흡사한 발음의 이탈리아어 ‘Lascia fare mi’(나를 내버려두오)였다.
그러나 한 음절씩으로 된 계명으로는 일정한 의미를 조합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자음이나 모음으로 된 ‘음명’이 암호를 담아내는데 더 적절한 도구가 됐다. 이것이 작곡가들이 즐겨 사용한 두 번째 암호 조합법으로, 뒤에 살펴볼 바흐·슈만의 ‘말놀이’는 음명을 엮어 의미를 빚어낸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문자열의 조합만이 음악 속의 암호를 엮어내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언어는 일정한 리듬과 악센트, 높낮이를 갖고 있으므로 음표의 악센트와 고저를 통해 어떤 단어나 문장을 상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상징’에 불과할 뿐 뚜렷한 의미를 확정하기란 곤란하다. 언어는 리듬과 높낮이뿐 아니라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있어야만 비로소 명백한 의미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현악 4중주 16번에서 ‘그래야 하나?’(Muss es sein?)라는 동기를 사용한 것이 이런 상징의 대표적인 경우다.
작곡가들이 즐겨 사용한 세 번째 암호는 기존의 악곡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베를리오즈가 ‘환상 교향곡’에서 성가 ‘분노의 날’(Dies Irae)의 음형을 삽입했을 때, 이는 성가 텍스트 그대로 신의 심판을 상징하는 은유가 된다. 이런 방법은 특히 구체적인 텍스트를 그대로 빌어올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애용된다. 기존의 선율을 그대로 멜로디에 빌어왔을 경우 너무 눈(혹은 귀)에 잘 띄이기 때문에 이를 부선율에 숨기거나, 베이스부의 진행으로 이용하거나, 음표의 앞뒤 순서를 바꾸어 역진행시키는 등의 방법도 쓰였다.
이러한 방법들에 의거해, 지금부터 위대한 작곡가들의 다양하고 기발한 음악 속의 암호를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음악 속 ‘암호’의 비밀은 극히 일부분일 수밖에 없다. 알려진 것도 대부분 작곡가가 사전에 공표한 ‘공공연한 비밀’에 불과하다. 암호와 수수께끼란, 의미 그대로 숨겨놓는 데 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야나체크가 현악 4중주 ‘비밀 편지’를 작곡했을 때, 그가 정부인 카밀라 시테슬로바에 대한 은밀한 메시지로 이 곡을 작곡했다는 짐작은 가능하지만 그 ‘비밀’이 작품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 바흐와 문자놀이-B·A·C·H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젊었을 때 이미 자신의 이름으로 4개 음표의 음렬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어의 음체계에서 일곱 번째 음은 B가 아니라 H로 불리며, 영어식 표기에서 ‘B♭’이 독일어식으로 B가 된다. 따라서 B-A-C-H는 다른 나라의 음명으로 Bb-A-C-B 가 된다. 이 네 음의 동기는 그러나 그의 노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언뜻언뜻 모습을 비친다. 수명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한 그가 작품에 각인처럼 숨겨놓은 자의식의 발로였을까.
크리스마스 코랄 ‘높은 하늘에서 나는 왔도다’에 의한 변주곡 등 여러 작품에 B-A-C-H의 음형이 모습을 보이지만, 이 문자열을 사용한 그의 대표적 악곡은 만년의 대위법적 걸작 ‘푸가의 기법’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네 개의 음렬(악보 1)은 반진행, 역진행 등 다양한 변형을 거치고, 이 기하학적 대작을 조립하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가 된다.

 

 

 

 


베토벤-그래야만 하는가?
베토벤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 4중주 16번 Op.135의 끝악장에는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동기가 등장한다. 베토벤의 자필로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 라고 적혀 있는 이 동기(악보 2)는 악센트나 음높이의 진행에서 씌어 있는 독일어 문장의 느낌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마지막 작품의 끝악장에 써 있는 수수께끼의 말’이라고 해서 이를 지나치게 심오한 쪽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독일에서 ‘Muss es sein?’ ‘Es muss sein!’은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사용되는 말로서 ‘그렇게 할까?’ ‘그러지’ 정도의 뉘앙스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전기작가들은 이 메모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더해 왔다. 생명의 종말을 느끼는 대작곡가의 어떤 중대한 결심이 반영돼 있다는 설부터 심지어 가정부의 급여를 놓고 고심한 흔적이라는 설까지 나타났지만 ‘정설’은 확인되지 않는다.

 

 

 

 

 


슈만과 연인들-파울리네·에르네스티네
바흐 이후 문자열에 의한 암호놀이를 가장 즐긴 작곡가로는 단연 슈만을 꼽을 수 있다. 클라라와의 연애는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로맨스’를 탄생시켰지만, 슈만의 암호놀이에는 클라라 이전에 사귀었던 많은 연인들이 개입돼 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1번인 ‘아베크 변주곡’이다.
제목에서 직감할 수 있듯, 작품의 주제는 a-b-e-g-g라는 다섯 개의 음렬로 구성돼 있다.(악보 3) 평범하면서도 로맨틱한 이 멜로디는, 이 작품을 헌정받은 백작의 딸인 파울리네 폰 아베크의 이름을 딴 것이다. 혹자는 그와 친했던 피아니스트 메타 폰 아베크의 이름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슈만이 염두에 둔 ‘바로 그 사람’에게 작품을 헌정했든, 아니면 성(姓)이 같은 다른 사람에게 작품을 선물로 주어 변죽을 울렸건, 그 자체가 슈만 청춘시절의 ‘수수께끼’로 흥미를 더한다.
또 하나의 문자놀이 작품으로서 대표적 피아노곡인 ‘카르나발’이 있다. 이 작품에는 As-C-H 또는 A-Es-C-H라는 음형이 기본 동기로 등장한다. 독일 음명에서 As는 Ab , Es는 Eb를 뜻한다. 이 작품을 쓰던 시절, 슈만은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에르네스티네가 살았던 거리의 이름은 다름아닌 Asch였으며, 철자 순서를 바꾸면 슈만의 이름에서 몇 글자를 뺀 Sch-a-가 된다. 모두 21개의 부분으로 된 작품 중 11번째의 ‘키아리나’에서 ASCH-SCHA의 재미있는 수수께끼 음형이 등장하고, 끝부분의 유명한 ‘다비드 동맹 행진곡’ 역시 As-C-H의 당당한 음형으로 시작된다.
브람스의 다양한 문자 변주
슈만을 깊이 사숙했던 수제자 브람스 역시 슈만 못지않게 작품 속에 특정한 의미를 숨겨넣기를 즐겼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는 ‘브람스의 모토’로 알려진 F-A-E(Frei aber einsam,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를 들 수 있다.
이 세 음의 동기는 원래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이 자신의 표어로 즐겨 입에 올리곤 했다고 한다. 요아힘과 친했던 스승 슈만도 이 세 개 음표의 동기에 의한 ‘F.A.E.’ 소나타를 1853년 작곡한 바 있다. 브람스의 작품에 이 동기가 나타난 대표적 사례로는 현악 4중주 2번 A단조의 1악장(악보 4)을 들 수 있다. 이 동기가 변주돼 더욱 즐거운 분위기로 변한 것이 교향곡 3번을 일관하는 ‘F-As-F’로, 이는 ‘Frei aber froh’(자유롭지만 즐겁게)의 약자로서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의 동기가 된다. 고독하든 즐겁든, 그의 일생을 수놓는 일관된 주제는 ‘자유’였음을 알 수 있다.

 

 

 

 

 

 
브람스는 옛 음악을 작품 속에 등장시켜 일정한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교향곡 4번 4악장의 유명한 변주곡 ‘파사칼리아’(악보 5)는 바흐 칸타타 150번 ‘주여 당신을 간구하나이다’(악보 6)에서 따온 것이다. 노년에 이른 그가 종교적 구원의 희구로 돌아서고 있다는 마음의 울림을 전해준다.
차이코프스키와 말러-과거의 모티브 삽입
알려진 대로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은 ‘비창’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이 제목은 극작가였던 동생 모데스트가 제안해 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모데스트 자신의 회상에 의한 것일 뿐, 진실에 어느 정도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필자의 경우 모데스트 자신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왜?
그것은 ‘비창’ 교향곡 첫 악장 서주의 동기(악보 7)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서주의 동기(악보 7)와 상당 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단조의 주음(主音)에서 시작돼 2도씩 두 번 올라갔다 한 번 내려오며 비장한 느낌을 자아내는 두 동기는 ‘비창’이란 제목만큼이나 닮아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비창’이라는 표제를 작품 속에 이미 숨겨두었던 것 아닐까.
한편 차이코프스키의 관현악 모음곡 3번 1악장에는 ‘엘레지’(비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서주에 이어지는 현의 중심주제(악보 8)는 눈물을 글썽이는 듯한 아름다운 표정의 선율이다. 작곡자 자신은 이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이 선율은 분명 뚜렷한 하나의 문학적 상징과 관계돼 있다. 그것은 차이코프스키 자신의 가곡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다.
악보 8의 마지막 네 마디 부분은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에서 ‘Allein und abgetrennt von aller Freude’(혼자, 모든 기쁨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버렸네)라는 가사 부분과 명백히 같은 음형을 이룬다. 음계 안에서 각 음의 위치가 다르고 멜로디의 빠르기가 달라 한 번에 인지하기는 힘들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음형을 ‘엘레지’ 안에 삽입함으로써 ‘이 악장은 고독감과 소외감에 대한 정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말러의 경우 만년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느릿한 하강 음형이 베토벤의 ‘고별’ 소나타에 등장하는 ‘고별의 주제’(악보 9)와 유사하다는 점이 음악사학자 그라우트에 의해 지적돼왔다. 이 음형은 교향곡 9번(악보 10) ‘대지의 노래’ 6악장 ‘고별’의 마지막 부분 등에서 빈번히 나타난다.
엘가와 수수께끼 변주곡
‘수수께끼 변주곡’은 엘가 자신이 붙인 제목이 아니다. 원래 제목은 ‘관현악을 위한 오리지널 주제의 변주곡’이었으나 첫 페이지에 ‘수수께끼’(Enigma)라고 적혀 있는데다 작곡가 자신이 작품에 숨은 수수께끼를 언급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수수께끼’ 변주곡으로 불리게 됐다.
작곡자가 제시한 수수께끼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각 변주에서 작곡자와 친한 지인(知人)들의 성격을 묘사했다는 것. 두 번째는 전곡에 걸쳐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숨은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숨은 주제)은 연주되지 않는다”라고 엘가는 말했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극성스런 연구자들에 의해 낱낱이 밝혀졌다. 엘가 자신이 각 변주에 ‘H.D.S.P.’ ‘님로드’ 등의 제목을 붙였으므로 어느 정도 예정된 결과였다. 예를 들면, ‘H.D.S.P.’는 휴 데이비드 스튜어트포웰이라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를 묘사한 변주다. ‘님로드’는 친구 요하네스 예거를 나타낸 변주였다. ‘예거’는 독일어로 사냥꾼을 뜻한다. 님로드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사냥의 명수다. ‘도라벨라’ 변주는 젊은 여인인 도라 페니를 묘사했다. 도라가 말을 약간 더듬는 것을 귀엽게 묘사한 싱커페이션이 특징이다.
이에 반해 두 번째 수수께끼는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숨은 주제가 있으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착안해 최초의 주제(악보 11)와 대위법적 혹은 화성적으로 연관성을 가진, 유명한 선율일 것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이에 따라 고금의 숱한 선율이 악보 11의 주제와 어울리는지 검증을 거쳐야 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세계인이 가장 잘 아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자인’이었다. 실제로 악보 11의 주제와 ‘올드 랭 자인’을 함께 부르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린다. 그러나 “엘가가 고작 이 정도 수수께끼를 숨겼다는 건가”라는 반론과 함께, 노래를 끝까지 부를 경우 결국 어긋나는 부분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설도 그다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음악, 암호, 그리고…?
음악은 아니지만, 체코 작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 ‘불멸’에서 베토벤의 ‘그래야만 하는가?’를 주된 사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같은 작품에서 말러 교향곡 10번을 소개하기도 했다. 말러는 이 작품을 쓰면서 아내인 알마를 향해 ‘당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적었다. 일종의 수수께끼를 암시한 셈이다. 쿤데라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그와 동향인 야나체크의 실내음악이 시종일관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예사롭지 않은 것은, 쿤데라가 ‘불멸’에서 제시한 주된 주제가 ‘의미소(意味素·meme)의 복제와 전파’라는 점이다. 그는 “큰 불멸과 작은 불멸이 있다. 큰 불멸이란, 생전에 그를 몰랐던 사람들 사이에서 죽은 다음에도 기억되는 것. 작은 불멸이란, 그를 알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기억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괴테가 말한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네’라는 화두도 그의 작품을 수놓는다.
한 사람에 의해 의미가 발생되면, 그것은 명백하게 표면에 나타나든지, 예술 작품에 숨든지, 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세상에 전파되고 복제된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도입한 ‘의미소’의 기본 개념이다. 암호나 수수께끼란 본질적으로 숨어 있는 의미소다. 그러나 추적과 개방을 그 과제이자 본질로 갖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밖으로 드러난 의미소보다 더욱 공격적이며, ‘위험하게도’ 강한 전염성을 갖는 것 아닐까?

 

월간 '객석'

 

 

 

 

 

출처 : 꽃별별
글쓴이 : 꽃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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