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이야기

[주제와 변주]피아니스트 다니엘 바렌보임(펌)

freeman1 2008. 10. 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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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강지처 버린 ‘주홍글씨’ 폄훼당한 ‘전인적 음악성’

사람들은 그를 미워했다. 불치병에 걸려 죽어가는 조강지처를 버린, 인정머리 없는 이기주의자라고 여겼다. 이 ‘비호감’의 강도는 한국에서 특히 셌다. 그의 연주와 지휘는 실제보다 격하되기 일쑤였고 음반도 도통 팔리지 않았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적어도 한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 얘기다. 바렌보임과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의 결혼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음악 커플의 탄생이었다. 바렌보임이 26세, 뒤 프레가 22세였던 1968년의 일이었다. 옥스퍼드대학 교수였던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뒤 프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키 작은 유대인’ 바렌보임과 결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 프레가 결혼을 위해 종교까지 유대교로 바꿨던 것은 유명한 얘기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면서 뒤 프레에게 닥쳐온 불행의 그림자. 그녀는 첼로를 켜다 자주 템포를 놓쳤으며, 나중에는 눈이 침침해지면서 악보마저 보이지 않았다. ‘다발성 근육경화증’이라는 희귀한 병. 그렇게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점점 굳어가던 그녀는 결국 73년 무대에서 내려왔고 87년 눈을 감았다. 42년의 짧은 생애였다.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 게다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알았던 순정한 여인. 이런 ‘훌륭한’ 아내를 돌보지 않은 ‘싸가지 없는’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뒤 프레가 세상을 떠난 후, 바렌보임을 언제나 따라다녔던 이 주홍글씨는 그의 연주에 대한 폄훼로까지 이어졌다. 사람들은 음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를 미워했으며,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정서적으로 불편해했다. 게다가 바렌보임은 “나는 하루 2시간 이상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는다. 그 이상은 내게 필요치 않다”고 공공연히 발언함으로써, ‘잘난 척하는 인간’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그렇게 ‘감정적 공분’을 샀던 바렌보임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였다. 그 결정적 계기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사상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만남이었고, 두 사람이 5년간 나눈 대화의 주요 부분을 간추린 <평행과 역설>이야말로 바렌보임의 이미지를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꾼 전환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바렌보임이 <평행과 역설>에서 보여줬던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은 아름다워요”라는 단순 어휘를 앵무새처럼 되뇌는 지휘자, “저는 바이올린이 전공이기 때문에 피아노 음악은 몰라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주자…. 그렇게 자기 분야에만 충실한 ‘전문가’들이 즐비한 땅에서 정치와 사회, 음악과 문화를 종횡무진 오가는 바렌보임의 ‘식견’은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 아닐까.

2년 전, 성공회대학의 신영복 선생께서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피아니스트 조은아를 소개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대화나 한번 나눠보라”는 뜻이었을 게다. 그렇게 알게 된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바렌보임 얘기가 나왔다. 그녀가 말했다. “조강지처를 버린 재주 많은 음악가 정도로만 생각했었죠. 그러다가 파리 샤틀레극장에서 바렌보임이 바흐의 ‘평균율’ 전곡을 연주하는 걸 들었어요. 그때 완전히 설득당하고 말았죠. 무엇보다 음악을 대하는 ‘시선’이 피아노만 아는 피아니스트들과 달랐어요. 억지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한 음 한 음에서 정신의 걸음걸이가 느껴졌어요.”

바렌보임은 어떤 음악가인가? 파리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와 시카고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으며, 2000년에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종신지휘자 자리에 오른 세계적 지휘자.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쇼팽 등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진 천재형 피아니스트. 게다가 그는 피아졸라의 탱고를 맛깔스레 연주해내는 크로스오버 연주자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평행과 역설>, <음악 속의 삶> 등을 통해 정치와 문화의 관계를 통찰해온 평론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의무를 전혀 이행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면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분쟁지역을 찾아가 베토벤을 연주하는 지식인이다.

그래서 그에게 ‘전인적’(全人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본다. 전인적 음악가 바렌보임. ‘전문화’라는 구호 아래 정치와 경제는 갈수록 막강해지고 개인의 능력과 시야는 점점 협소해지는 세상. 그렇게 인간의 삶이 갈수록 왜소해지는 21세기에, 이 얼마나 특별하면서도 빛나는 존재인가.

 

 

재클린 뒤 프레와
다니엘 바렌보임
의 결혼은
당시로써는 선남선녀의 결혼이었지만

실제 그들의 결혼 생활은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예민하고 질투심많고 날카로운 유태인 바렌보임과
역시 예민하지만 순정적인 영국인 뒤 프레의 사이는
뒤 프레가 개종하여 유태식 결혼식을 올리고
바렌보임의 친구들과 친밀하게 지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렌보임의 예술가적인 신경질에 종종 상처입었고
병이 발병할 무렵에는
이미 둘 사이는 상당한 금이 가있던 상태였습니다.

병의 초기에는 바렌보임이 헌신적인 간호도 하였지만
얼마 후 결국 이혼하게 되죠.

여기에 관해 얼마 전에 나온 영화인
<힐러리와 재키>는 다소 이상한 견해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뒤 프레가 바렘보임이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음악적으로 힘들어하고 고민했던 것만은
사실이라고 알고있습니다.
(뒤 프레가 영하의 모스코바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고민하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자신의 명기인 다비도프를
일부러 호텔 베란다에 방치하는 장면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이 부분은 물론 실화죠)

바렌보임은 뒤 프레의 사후에
몇 명의 여인들과 소문이 있다가
80년대 후반에
기돈 크레머의 부인을 빼앗아 결혼하였는데
그때도 상당히 말이 많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렌보임의 인간성을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그가 지휘하는 베토벤의 교향곡이
감동을 주는 점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바그너를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까요?)

<힐러리와 재키>의 연주 장면은
언제 한 번 같이 감상해볼만한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좀 별로지만
연주 장면은 괜찮습니다.